Ⅰ.서론

 

a. 연구동기

4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드디어 심리학 수업을 듣게 되었다. 심리학 수업에서 과제로 작품 속의 정신장애 인물연구가 주어졌다. 여러 작품 중 여러 차례 수업시간에 언급되었던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피아노를 치는 여자’도 있었지만 나는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머지 다른 작품들을 알아보았는데 그 중에 약간은 엽기스럽다고 느낀 사건을 소재로 삼은 ‘에쿠우스’에게 관심이 갔다. 엽기스럽다고 느낀 사건은 다름 아닌 스물여섯 마리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마구간 소년의 괴기적인 범죄이다. 이 사건은 한때 영국의 법정에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던 실제 사건인데 나는 실화인 것을 알고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엽기적인 행동을 한 어린 소년이 마냥 정신질환자 또는 양심이 없는 사이코패스 방향으로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스물여섯마리의 눈을 찔러야만 했던 어린 소년의 상황에 강한 궁금증을 느끼게 되었고 알 수 없지만 거대한 내막에 힘들어 했을 어린 소년에 측은함을 느끼기까지 했다. ‘에우쿠스’라는 이 작품은 작가인 셰퍼가 2년 반에 걸쳐 창작한 희곡이다. 나는 이 작품을 토대로 한 학기동안 배운 지식으로, 동원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주인공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b. 연구목적

정신분석학에 새로운 큰 획을 그은 프로이드에 의하면, 정신분석학은 모든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행동의 기초가 된다고 한다. 프로이드는 㰡억압(Repression)㰡‘이라는 정신현상을 발견하였는데, 이 ‘억압’이란 것은 의식 속에서 생각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억압은 무의식적인 과정인데 이는 고통, 상처, 갈등 등의 마음의 괴로움을 의식으로 받아들이기에 너무 고통스러운 사물이나 사건을 선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억제하여 기억 밖으로 사라지게 한 것이다. 프로이드는 성욕을 억압하게 되면 신경증 증세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인간의 성 본능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인간 성격 발달의 시작기라고 할 수 있는 영․유아기에서부터 인간의 정신과 성이 어떻게 발달해 가는가 하는 점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위 정보에 근거하여 ‘에쿠우스’의 주인공인 ‘알런’의 심리를 분석하였다. 어렸을 때 성장과정에서의 알런의 모습이 성장한 후의 알런의 성격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알런의 영․유아기 성장과정 속 무의식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이해하여야 엽기적인 행동과 불량스런 행동의 원인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비단 알런 혼자의 힘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에 의한 힘 즉 부모님의 영향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인 ‘다이사트’라는 인물을 분석해 볼 수 있다.

 

 

Ⅱ.본론

 

a. ‘에쿠우스’소개와 줄거리

먼저 작품소개를 하자면, 이 작품의 작가인 ‘피터 셰퍼’는 인간의 존재와 인식을 출발점으로 하여, 단순히 생의 파편을 통해서 진실을 추구하기 보다는 상황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의미와 현대인의 근원적인 실존 문제를 탐구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셰퍼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인간 소외와 고독이라 할 수 있는데, 비정하고 허망하며 부조리한 오늘의 현실을 풍자적인 시점에서 날카롭게 파헤침으로써 애정 부재의 인간관계를 폭로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셰퍼가 노리는 과제는 어떠한 신분이나 성격의 인물이 아니라, 잔혹한 투망 속에 갇히고, 비정한 톱니바퀴에 끼여서 궁지에 몰려 있는 현대인의 나상(裸像)이며 조건인 것이다. 이처럼 궁지에 몰린 인간 조건을 파헤치고 분해함으로써 남는 것이라곤 오직 성(性)과 폭력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1973년 영국의 올드빅극장에서 초연되었고 그 후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라틴어로 말이란 뜻의 에쿠우스는 영국 법정에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스물여섯 마리의 말의 눈알을 쇠꼬챙이로 찌른 마굿간 소년의 괴기적인 범죄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현대문명과 기성도덕, 또 그에 따른 기성세대의 위신을 비판하여 현대인의 절망과 고뇌를 그렸다.

다음으로 등장인물에 대해 소개해보면, 주인공은 ‘알런 스트랑’이라는 어린 소년으로 스물 여섯 마리의 말의 눈을 찌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또 다른 주인공은 그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인 ‘마틴 다이사트’이며 그 외에 알런의 부모님인 ‘알런 프랑크’와 ‘도라 스트랑’등이 등장한다.

교사 출신의 광신적인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와 무신론자인 인쇄공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난 알런은 여섯 살 때 바닷가에서 말을 탄 기사를 보게 되고 그때부터 말은 그의 의식 속에 전지전능한 초월자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아 종교와 억눌린 성의 대상으로 믿게 되고 이 믿음은 자기와 말이 하나라는 생각에 이른다. 말을 자신의 목숨과 같이 사랑한 까닭에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는 믿음으로 알런은 ‘질’이라는 여자아이의 소개로 자연스럽게 마구간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밤마다 ‘너겟’이라는 말을 끌고 가 들판을 달리며 현실의 세계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신비롭고 황홀한 해방감을 느끼는데 이는 생의 희열을 맛보고 생명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알런이 질과 만나 정사를 벌이려는 순간, 놀라서 일어난 그가 그토록 자신이 숭배해 온 말의 눈을 찌른다. 그것은 말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에 대한 배반은 그에게 가장 무서운 죄의식을 느끼게 해 주었고, 그 결과 알런 자신의 모든 의식이 스스로 폭발한다. 그 순간 지금껏 신으로 대해 온 말들이 자신의 또 다른 본능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변한 것이다. 말의 눈을 찔러 잡혀 온 알런의 정신치료를 위해 가정법원의 여판사 ‘헤스터’가 그를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트’에게 데리고 간다. 희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마틴 다이사트가 알런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알런의 지난 경험과 의식이 드러난다. 한편 마틴은 알런을 치료하면서 자신에게는 이미 없어진, 생에 대한 강렬한 열정의 부재를 깨닫는다. 현대의 문명 속에서 소외된 인간, 기능인으로 전락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권태와 무력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규격화되고 일방적인, 올바른 가치관이 상실된 혼돈의 세계와 문명안에서 인간은 현실과 자아, 실존과 의식의 분열에 마주치게 되고, 그 결과 고독한 방황을 피할 수 없는 삶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래 '에쿠우스'란 말은 라틴어로 '말(馬)'이란 뜻인데 이 작품에서는 상징적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신이라든지, 숙명의 굴레라든지, 냉혹한 현실이라든지, 원초적인 성의 본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내면적 소외의 극한은 모든 외부세계와의 관계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안에서 인간은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이 영화는 강렬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b. 각 장면 분석

- 1막 2장 -

알런의 사건을 담당한 판사 ‘헤스터’의 오늘 바쁘셨냐는 질문에 “뭘 별로... 열다섯 살 난 정신분열증 환자와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긴장병을 일으킨 여덟 살 난 소녀뿐이죠. 그뿐이죠” 라고 ‘다이사트’는 대답한다.

→ 열다섯 살 난 정신분열증 환자와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긴장병을 일으킨 또 다른 소녀를 맡은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이사트는 아무렇지 않은, 가벼운 일인 마냥 이야기한다. 이것은 남들에게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조차 자신에게는 거뜬히 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 나타낸 것인데 이 우월감은 일종의 방어기재(defense mechanism)라고 볼 수 있다. 불안과 열등감으로 인한 상처를 피하기 위해 이것을 감추기 위한 것이 우월감으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알런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는데 여기서 완벽하게 일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다이사트의 강박적 성격장애가 드러난다. 이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나 외부에 의해 어떤 주어진 일에 대한 완벽함을 강요당하거나 그런 강압에 의해 자신의 부족하고 자신 없는 부분을 감추고자 하는 방어기재가 생긴 것이다.

 

- 1막 3장 -

다이사트의 질문에 알런은 답하지 않고 계속 같은 노래를 반복한다.

→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계속 노래를 반복하여 부르는 것은 다이사트를 경계한다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말, 질 외의 알런의 친구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곧 알런이 혼자지내는 시간이 많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이 거의 없으므로 자신외의 타인을 경계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더불어 광신도인 어머니와 무신론자인 아버지의 이질적인 종교관을 가진 부모님 사이에서 혼자라는 느낌은 배가 되었을 것이다.

 

- 1막 5장, 6장 -

다이사트는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의 우두머리 신관이 되는 꿈을 꾼다. 그리고 “꼭 고발당한 기분이라니까. 그도 아주 매섭게 말에요. 그 애를 치료하다보면 오히려 이쪽이 불안해.”하며 헤스터에게 자신의 불안함을 표현한다.

→ 꿈은 현실세계에서 받은 모든 기억중에서도 잊고자하는 혹은 잊혀졌다고 생각하는 무의식의 표출공간이다. 다이사트가 꾼 꿈은 알런의 치료를 맡게 되면서 느낀 부담과 불안함이 표출된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아무런 가치 없는 생활에 자신에게 는 없는 알런의 정열에 더욱 불안함을 느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돌 위에 내던져진 희생자가 모두 알런의 얼굴이었다는 다이사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 1막 10장 -

나를 말 등에 올려 태웠어. 말에서 흐른 땀이 내 다리까지 적시고 그 청년이 날 꽉 잡고는 내가 가고 싶은 대로 말을 몰아줬지. 가고 싶은 대로 달려가는 그 힘 무척 따스한 그의 옆구리 그 냄새, 그런데 갑자기 난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빠가 끌어 내린 거야. 할 수만 있다면 두들겨 패주는 건데...

→ 알런은 친구나 부모에게 보여야할 애착을 그들이 아닌 말에게 불안한 애착을 보인다. 알런에게는 말이 친구이자 부모이자 신적인 존재인 것이다. 자기 혼자 맞설 수 없는 아빠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대상이 필요한 알런은 기수 등 뒤에 숨어 아빠에게 맞서려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말에게 적대감을 보이고 자신에게 안정에 대한 욕구를 채워 주지 않는 아빠를 미워하고 경계하면서 이런 아빠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을 찾아낸 것이다.

 

- 1막 16장 -

질과의 데이트 사실을 묻는 다이사트 질문에 알런은 화를 낸다.

→ 알런은 질과의 관계를 숨기고 싶어 하는 동시에 야한 영화를 보고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숨기려 한다. 그것이 부도덕한 일인 것을 알기 때문에 충동이나 성적인 욕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또 그것을 남에게 밝히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강압적인 다이사트의 질문에 알런의 분노는 더 크게 나타난다.

 

 

 

- 1막 17장 -

“틀림없이 마누란 손목도 안 잡을 거야. 애들도 없잖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으니깐 그렇지?”라는 알런의 도발에 다이사트는 “(날카롭게) 돌아가 네 방에가. 어서 (다이사트 허탈한 상태에서 관객에게 말한다.) 똑똑한 애입니다. 아주 놀랄 정돕니다. 다급한 처지에서도 똑똑한 방어를 하고 있는 겁니다. 맹랑한 녀석 그 놈은 물어 보려는 걸 빤히 알고 있는 겁니다. 정말 병원 안을 누비고 돌아다니며 제 처에 관한 걸 알아보았나 봅니다. 맹랑하고 총명한 놈이죠. 어린이들을 베어낸 얘기를 털어 논 다음부터 그 애는 나를 안경을 끼고 보는 게 경계하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도 신기할 건 없지만 말입니다. 심한 정신병 환자들은 이러한 게임에 아주 능숙합니다.”라며 대변한다.

알런이 자신의 허점인 부부생활에 대한 공격을 해오자 다이사트는 그런 상황의 자신은 인정하지 않은 채 알런을 심한 정신병 환자로 몰며 일어난 상황에 대해 합리화시킨다. 합리화는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태도, 신념이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자아가 그럴듯하게 용납할 수 있는 이유를 댐으로써 의식은 물론 윤리도덕에도 부합되도록 설명하려는 심리기제이다. 완벽주의자인 다이사트는 자신의 생활과 일에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런이 숨기고 싶었던 아내와의 섹스 장애에 대해 공격 해오자 침착하고 냉정한 다이사트도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어린시절 바른생활과 성공을 강요한 부모에 의해 억압받은 욕구가 아내와의 섹스 장애로 이어졌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숨기고 싶은 내용을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하며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지 않고 마음의 상처를 회피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 1막 19장 -

다이사트는 알런에게 최면을 걸어 어렸을 적의 해변의 일을 말하도록 만든다. 알런은 자신의 상상에서 만든 에쿠우스라는 말과 예수를 혼동하고 있다.

다이사트: 그는 너에게 뭐라고 했니?

알런: 내가 너를 보고 있다. 내가 너를 구해주리라.

다이사트: 어떻게 해서

알런: 너를 태워주리라. 둘을 하나가 되는거다 하고...

→ 알런은 트로샷(에쿠우스)과의 대화 내용에서, 알런은 말을 예수와 혼동하며 말을 타는 것이 구원 받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재갈을 물고 있는 것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 말한다. 이것은 알런에게 에쿠우스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재갈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과 예수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절실한 광신도 어머니와 강압적인 무신론자 아버지 사이에서 어린 시절 신체접촉 등으로 애정을 전달하여야할 어머니와 주위 환경에 대한 안정감을 주어야 할 부모의 역할이 수행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해서 정상적인 애착을 가지지 못하여 생겨난 이런 비정상적인 애착은 부모나 친구가 아닌 말에게 생성되어 말이 예수와 같은 절대적인 신적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 속에서 불만족스런 욕구들과 입게 된 상처들이 알런을 에쿠우스와의 어두운 제의가 일어나는 그들만의 세계로 계속해서 밀어 넣은 것이다. 알런은 가족이 아닌 말을 통해 위로받고 안정을 보장받는 것이다.